일요서울

모든 걸 다 주니깐 떠난다는 그 사람, 정말 아무 책임도 없을까?

혼인빙자간음죄의 위헌 결정

혼인빙자간음죄가 헌법재판소에서 2009년 위헌으로 결정된 지 이미 15년도 넘게 지났다. 혼인빙자간음죄는 과거 형법 제304조에 규정되어 있던 범죄로, 결혼을 약속하거나 결혼할 것처럼 속여 여성과 성관계를 한 경우 이를 처벌하는 규정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성인 간의 성적 관계에 국가가 형벌을 통해 개입하는 것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해당 규정을 위헌으로 판단하였다.
이 결정 이후 형법에서 혼인빙자간음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는 “결혼할 줄 알고 성관계를 하게 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형사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종종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결혼을 약속하고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버렸습니다. 그 사람에게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경우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혼인빙자간음죄가 없어진 이상, “결혼할 줄 알고 성관계를 가졌지만 떠나버렸다”는 자체만으로 그 사람을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속이거나 이용한 행위가 있는 경우 등 여전히 법적 책임이 발생하는 경우는 여전히 있을 수 있다.

혼인빙자간음행위의 민사상 책임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되었다고 하여 그러한 행위가 아무런 법적 평가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혼할 의사가 없거나 현실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결혼을 할 것처럼 속여 성관계를 하게 만드는 행위는, 경우에 따라 민사상 불법행위로 평가되어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연인 사이의 감정 문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기망하여 그 신뢰를 이용하고 그로 인해 정신적·사회적 손해를 발생시킨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법원은 이러한 경우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
다만 이러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결혼을 생각했었는데 결국 헤어졌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법원은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정도의 거짓말이나 관계의 변화까지 법적 책임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속임수의 정도가 사회통념상 용인되기 어려운 수준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미 기혼자인 사람이 이혼 후 상대방과 결혼을 할 것처럼 속이거나, 자신의 혼인 사실을 숨기고 아예 미혼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교제와 성관계를 지속한 경우라면, 법원은 대체로 이러한 행위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기망행위로 보아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혼인빙자간음행위와 형사상 책임

또한 혼인빙자간음죄 자체는 사라졌지만,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형사책임이 발생할 수 있는 경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첫 번째로, 혼인을 할 것처럼 속여 상대방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신뢰를 이용해 금전을 교부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 자금, 신혼집 마련 비용, 생활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처음부터 결혼할 의사가 없었다면 이는 단순한 연애 문제가 아니라 금전 처분을 유도한 기망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형법상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으며,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와 별도로 이미 지급된 금전에 대해서는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부당이득 반환 청구도 가능하다.

두 번째로 상대방이 미성년자인 경우이다. 우리 형법은 여전히 위계(속임수)를 이용하여 미성년자를 간음한 경우를 처벌하고 있다. 이때 말하는 ‘위계’는 단순한 강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속임수도 포함된다.

따라서 미성년자인 상대방에게 결혼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장래의 혼인을 약속하면서 성관계를 유도한 경우라면, 이는 미성년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위계에 해당할 수 있고, 그 경우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법원은 이러한 위계의 범위를 비교적 넓게 해석하고 있어, 성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정에 대한 속임수라도 성관계의 동의에 영향을 미쳤다면 위계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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